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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9호] 탈북 브로커를 만드는 사회 : 김광호 이야기
좋은벗들 2010.10.06 10952




함경북도 회령시 남문동에 사는 김광호는 올해 33세의 노총각이다. 가족으로는 홀아버지와 누이동생이 있는데, 워낙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밑바탕이 없어 오랫동안 가난한 살림을 면하지 못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광호씨는 동네 사람들 집에 가서 일을 해주고 얼마간의 돈이나 식량을 받아 생계에 보태왔다. 광호씨 친구들에 따르면, 동네에서는 경제토대가 없는 그를 ‘머슴처럼’ 일을 부려먹고 얼마간의 끼니를 때울 정도의 식량을 주는 식이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대덕리 순안골에서 소토지 농사를 지으며 끼니에 보탰지만 세 식구 입에 풀칠하는 일이 쉽지 않았다.

광호씨는 집 살림이 워낙 가난하다보니 결혼할 생각은 꿈도 못 꾸고, 그저 돈을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벌지만 궁리하게 됐다고 한다. 그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생계 상담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나라의 법을 어기는 큰일이라고 해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 그런데 할 방법이 없어 못하는 것”이라는 얘기를 종종 털어놓곤 했다고 한다. 그러다 1년 전 어느 날, 사람 찾는 일을 도와달라는 제안을 받게 됐다. 전국 각지에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찾아 주면 약간의 돈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단순히 사람 찾기가 아니었다. 일종의 탈북브로커 일이었는데, 광호씨가 가장 끄트머리에서 적은 돈을 받고 직접 발로 뛰는 일을 하게 된 것이었다. 물론 처음부터 위험부담이 높은 일을 맡게 된 것은 아니었다. 광호씨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일을 잘 하는지 점검 차원에서 소소한 일거리들을 먼저 시켰다. 광호씨는 쉬운 일이든, 어려운 일이든, 돈이 적든 많든 상관없이 당장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지덕지하며 하나둘 맡은 일들을 해나갔고, 점점 위험부담이 높은 일들이 맡게 되었다.

올해에는 국군포로나 납북자들을 찾아내는 일이 유독 많았다. 올해 6월에는 평안남도 순천시 강안동에 사는 리호구(68세)씨를 찾는 일을 맡아했다. 리씨는 1970년대 초 서해에서 고기잡이를 하다가 태풍으로 북조선 영해에 넘어갔다가 나포된 뒤 남한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었다. 남한에 사는 아들이 아버지를 찾으려고 탈북 브로커에게 의뢰한 일이 광호씨에게 떨어진 것이다. 광호씨는 리씨를 찾으려고 한 달 동안이나 순천을 샅샅이 뒤져 리씨를 찾아냈다. 워낙 납북자 가족에 대한 감시가 심하다보니, 감시자의 눈을 피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광호씨는 리씨의 아들이 보낸 사진과 편지, 소개장들과 함께, 만의 하나 붙잡힐 경우 줄줄이 엮여있는 다른 브로커들의 안전을 담보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라며 건네받은 약도 가져갔다. 광호씨가 보위부에 붙잡혀 자살을 하더라도, 뒤에 남은 가족들의 생계는 철저히 보장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상태였다. 그 후 련봉동에 사는 노인 한 명을 데려가는 일을 연달아 성공시켰다. 이 과정에서 노인들을 감시하던 보위부원 끄나풀 한 명을 살해하기도 했다. 처음으로 저지른 살인이었다. 광호씨 친구들에 따르면, 어렸을 때 동네에서 주먹질도 제대로 하지 않았을 만큼 착했던 친구가 매섭게 변한 것도, 집안 살림 형편이 눈에 띄게 펴지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고 한다.

사람 찾는 일을 한 건 1년 전부터였지만, 그동안에는 일거리를 소개해준 사람들이 큰돈을 가져가고 광호씨는 푼돈만 손에 쥐었다면, 납북 어부를 찾은 뒤에는 광호씨에게도 드디어 목돈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생활에 꽃이 피고 향기가 풍기는’ 날이 도래한 것이다. 집에 없던 TV와 록화기가 생기고, 중고자전거도 들이고, 해진 옷 대신 시장 매대에 걸려있던 중국산 기성복을 입고 다니게 됐다. 그래도 남의 눈을 의식해 아버지는 소토지 농사를 계속 짓는 시늉을 했다. 갑자기 농사를 안 지으면 사람들이 “저 집은 버는 사람도 없는데, 어떻게 저리 잘 사는가?”라며, 당장 의심 살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의심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었다. 화폐교환 조치 이후에 다들 사람들 살림살이가 곤궁해진 처지에, 전 같으면 이미 굶어죽었을 집에서 기름 냄새가 풍기니 주시하는 눈들이 많았던 것이다. 특히 광호씨네 인민반을 담당하는 보위부의 눈초리를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7월 초부터 보위부원들은 광호씨가 소속된 기업소에 가서 출근 상태를 확인하고, 가난한 집에서 어떻게 한 달에 12,000원이나 내고 직장에 안 나올 수 있는지 뒷조사를 했다. 또 광호씨와 어울려 다니는 친구들을 탐문하기 시작했다. 보위부에서 뒷조사를 하는 것 같다고 넌지시 알려주는 이웃이 있어 가족 전체가 바짝 긴장한 것은 7월 중순쯤이었다.

그러다 7월 말에는 보안서에서 가족들을 직접 호출했다. 보안서에서는 아버지와 누이동생을 불러 7년 전에 도강했다는 소문만 돌 뿐 행처를 모르는 누나의 소식을 꼬치꼬치 따져 물었다. 갑자기 생겨난 TV며 록화기 등을 일일이 지적하면서 어떻게 수입 대 지출이 맞지 않은 생활을 하게 됐느냐고 추궁했다. 아버지는 큰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정말 모르며, 지금 돈이 좀 있는 것은 아들이 군대 가 있는 동안에도 소토지 농사를 열심히 지어 돈을 얼마간씩 마련해왔다고 했다. 보안원들은 화폐 개혁한 지가 언제인데 그런 말로 속이느냐며 다시 다그쳤고, 아버지는 인민폐로 바꾸어 간직하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보안원들은 “중국에 간 딸이 돈을 부쳐준 것이 아니냐, 언제 몇 번이나 부쳤는지 대라”며, 도강한 큰딸이 보낸 것이라 믿고 심문을 계속했다. 아버지는 완강히 부정하면서 버텼다. 급기야 보안서에서는 가택수사 영장을 받아 집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큰딸과 연계를 가진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현금 12만 원 정도만 나왔다.

이 무렵 광호씨는 산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는데 다시 사람 찾는 일을 의뢰받았다. 9년 전 탈북한 여성이 한국에 정착해 살고 있는데, 자신이 두고 온 아들을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은 것이다. 탈북한 여성의 사진과 편지를 받아 은덕군에 있는 그 집을 찾아갔더니, 아이 아버지가 쉽사리 보내려 하지 않았다. 아이가 5살 되던 해 떠난 아내를 대신해 지금껏 고생하며 키웠는데, 그냥 보낼 수 없다며 자신이 따라가겠다고 했다. 말로는 키운 대가로 뭘 바라서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사는 게 너무 힘드니 뭐라도 도움을 받고 싶다는 것이었다. 광호 씨는 아이만 데려오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이런 상황은 처음이라 멋모르고 남편까지 데려갔다. 그런데 남편은 아이 엄마와 통화하면서, 인민폐 1만 위안을 보내지 않으면 아이를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꿨다. 돈말이 오가며 통화가 잦아지고 길어지다 보니 보위부의 감시망에 덜컥 걸리고 말았다. 은덕군에서부터 통화를 해온데다 국경연선지역의 손전화기 단속이 매우 삼엄해서 조심했지만, 그만 꼬리를 잡히고 만 것이다.

그동안에도 광호씨는 전혀 눈치를 못 채고 자신에게 일거리를 주는 사람장사꾼과 아이 아버지를 연계해주었다. 아이 아버지는 인민폐 8천 위안으로 합의를 보고, 돈을 챙긴 뒤 은덕군으로 돌아가다가 보위부원들에게 붙들렸다. 아이는 사람장사꾼과 같이 두만강을 건너려다 현장에 매복해있던 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됐다. 광호씨도 산에서 숨어 있다가 집에 잠깐 들르던 차에 붙잡혔다. 이들은 종신형을 선고받고, 청진시 수성교화소에 보내졌다. 이 소식은 “아버지가 자기 친아들을 인민폐 8천 위안에 팔아넘긴, 요즘 시대에 보기 드문 악질적인 인신매매 행위”라며 주민들에게 공개됐다.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광호씨 친구와 이웃들은 한 평범하고 착했던 사람이 먹고 살려고 심부름을 하다가 이렇게 큰일까지 당하게 됐다며, 광호가 나쁜 게 아니라 광호를 그렇게 만든 이 사회가 잘못된 것이라며 개탄해마지 않고 있다. 결국 ‘반동분자’라는 것이 어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잘못된 사회가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퍼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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