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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투쟁의 현장,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먼 이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항일전투 2 - 청산리 전투
좋은벗들 2006.09.20 4600


일본군의 간도 침범
일제는 독립군 토벌계획이 실패로 귀착되자 토벌군을 직접 간도에 침입시켜 독립군과 항일단체를 근원적으로 초멸하려는 대규모의 계획을 수립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간도침범 계획은 독립군 토벌 뿐만 아니라 동시에 만주침략의 기반형성이라는 일거양득의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20년 8월까지 간도침범을 위한 모든 준비를 완료해 놓고, 10월 초에 훈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해 냄으로써 간도 침략의 빌미로 삼았다.

훈춘사건
일본군은 장강호(長江好)라는 중국 마적두목을 금전으로 매수하여 마적에게 무기를 대여한 뒤 그들로 하여금 훈춘을 습격케 함으로써 사건을 만들어 낸 것이다. 약 400명의 마적단은 1920년 9월 25일 훈춘 북방의 심자구자(瀋子溝子)에 출현하여 10월 2일 새벽 5시에 야포 3문을 성 밖에 걸어 놓고 훈춘성을 공격하였다. 이 때 훈춘의 일본 영사관 분관에는 영사관 경찰과 총독부 파견 경찰대 및 총독부 함북경찰대 등에 소속된 50여 명의 병력이 있었다. 중국측의 요청에 의해 이들 병력이 한쪽 성문을 수비하였으나 마적들은 일제측과의 약속대로 무난히 성문을 통과하여 오전 9시까지 4시간 동안 약탈과 살육을 자행하였다. 결국 장강호 마적의 기습에 의해 중국군 70여 명과 한인 7명이 살해당하는 참화를 입었고, 영사관원들이 피난한 뒤 비어 있던 일본 영사관 분관이 불살라졌다. 또한 조선총독부 함북파견 경찰 일가와 일본인 부녀자 9명도 아울러 살해되었다.
이상과 같은 훈춘사건을 구실로 일제는 대기상태에 있던 토벌대병력을 사건 당일부터 만주지역에 투입하였다. 중국 당국과는 사전 교섭이나 연락도 없이 신속하게 만주를 침범한 것이다.

독립군의 백두산록(白頭山麓) 이동
북간도 각지에 근거지를 둔 여러 독립군단은 중국측과의 불가피한 타협을 이행하기 위하여, 그리고 일제 '토벌군'의 간도침략을 사전에 막기 위해서 근거지 이동이 요구되었기 때문에, 1920년 8월 하순부터 원래의 근거지를 버리고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길에 올랐다.
가장 먼저 장정에 오른 독립군부대는 홍범도가 인솔하는 대한독립군으로서 8월 하순 명월구(明月溝) 본영을 떠나 백두산을 향하여 서남방으로 이동하기 시작하여 한달 만인 9월 20일경에 안도현(安圖縣)과 접경인 화룡현 이도구(二道溝) 어랑촌 부근에 도착하였다.
대한독립군에 뒤이어 봉오동전투 때 합동작전을 벌였던 안무(安武)의 대한국민군도 8월 31일 라자구의 근거지를 떠나 안도현 방면을 향하여 장정길에 오른 뒤 9월 말경에 역시 이도구 지방에 도착하였다. 한편 최진동의 군무도독부는 군사통일과 새로운 기지건설 등의 문제로 홍범도·안무 등과 의견일치가 안되어 장정은 개시하였으나 백두산으로 향하지 않고 9월 말경 라자구에 도착하였다. 또한 대한의군부·대한신민단·대한광복단·의민단 등의 여러 독립군단도 9월경에 서남방의 안도현 혹은 동북방 라자구로 이동하였다. 북간도 여러 독립군단 가운데 가장 늦게 장정길에 오른 독립군부대는 왕청현 심리평에 본영을 둔 김좌진 장군의 대한군정서였다.
김좌진 사령관이 인솔한 대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인솔한 대한독립군·대한국민군 등의 연합부대는 1920년 9월 하순부터 10월 상순까지 새로운 항일근거지를 건설하고자 각기 원래의 본영을 떠나 4∼5백 리를 장정한 후 청산리전투의 격전장이 된 화룡현 이도구와 삼도구의 서북방 밀림지대로 진군하였다.


독립군의 임전 준비
독립군 연합부대 병력은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어 확실한 규모를 밝힐 수 없으나 대략 다음과 같다. 대한군정서 600명, 대한독립군 300명, 대한국민군 250명, 대한의군부 150명, 훈춘한민회 200명, 대한광복단 200명, 의민단 100명, 대한신민당 약 200명 등 약 2천 여 명에 달했다 한다.
10월 초순까지 이 2천 여명의 병력은 삼도구 청산리 일대와 이도구 어랑촌 일대에 포진하여 간도를 침입한 2만 명 가운데 청산리지역으로 침입한 5천 명 정도의 일제 토벌군 동지대(動支隊)와 대결하기 위해 연합작전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대한국민회는 "광복사업의 성패의 추"라는 포고를 내면서 한인 매호당 10원, 그리고 모든 동산, 부동산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금전을 군자금으로 모집하기 시작하였다.

청산리 전투
청산리전투는 좁은 개념으로 보면 1920년 10월 21일 김좌진이 지휘한 대한군정서 독립군이 화룡현 삼도구 청산리 백운평 계곡에서 독립군 토벌을 위해 칩입한 일본군 동지대 소속의 산전연대(山田聯隊)를 크게 격파한 전투로 한정시킬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청산리전투라 할 때에는 대한군정서는 물론 이도구 어랑촌 부근의 산림지대에 집결한 홍범도 휘하의 독립군연합부대(대한독립군을 비롯한 대한국민군·훈춘한민회·의민단·대한신민당 등)가 10월 21일부터 26일 사이에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어랑촌(漁郞村)·천수평(泉水坪)·고동하(古洞河) 등 2, 3도구 서북편의 밀림장곡에서 전개한 대소 10여 회의 승첩을 통칭하여 의미한다.
일제의 간도 침략군 가운데 청산리 일대에 침범한 동지대는 용정과 무산 방면에 진출하여 천보산(天寶山)에 주력을 두고 있었으며, 그 산전연대의 주력부대는 20일 삼도구로부터 청산리 골짜기로 침입해 오기 시작하였다. 김좌진 사령관은 그들과 대전하기에 가장 유리한 지형이라고 판단한 골짜기마다 독립군을 전투편제로 이중 매복시켜 놓은 뒤 일본군을 현장으로 유인하였다. 독립군이 매복한 계곡은 청산리 골짜기 중에서도 폭이 가장 좁고 좌우 양편으로 깍아지른 듯한 절벽이 솟아 있으며 그 사이에는 백운평이라 부르는 공지가 있어 청산리계곡을 통과하려면 단 하나의 오솔길인 그 공지를 지나게 되어 있었다.
안천(安川)소좌 인솔 하의 산전연대의 전위 부대는 독립군 매복사실을 전혀 알지도 못한채 21일 아침 8시경 백운평을 침입하기 시작하여 1시간 만인 상오 9시경에는 그 곳을 점령하다시피 하였다. 일본군이 최전선의 독립군 매복지점으로부터 불과 10여 보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바싹 근접하였을 때, 김좌진 사령관의 공격 명령과 함께 600여 명의 독립군은 일본군이 다다른 중앙의 공지를 일시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불의의 협공을 받은 안천 전위부대는 독립군의 공격에 대한 응전을 시도하였으나 매복장소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속에서 전열이 곧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독립군은 30여분 동안의 집중 공격으로 200여 명의 전위부대 전원을 섬멸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리게 되었다.
안천(安川)전위부대의 전멸에 뒤이어 백운평 방면으로 뒤따르던 山田 연대의 주력부대도 기관총·산포(山砲) 등의 중무기를 앞세우고 백운평 교전지를 향하여 돌격해 왔다. 그러나 주력부대 역시 절대적으로 유리한 지형을 확보하고 있던 독립군의 집중공격에 수많은 사상자만 나오게 되자 보병과 기병으로 몇 개의 중대를 편성하고 독립군을 협공하기 위해 고지를 따라 돌격하면서 우회하였으나 절벽 위에서 사격하는 독립군의 화력을 당할 수가 없었다. 이에 부대를 약간 후퇴시켜 전열을 재정비한 뒤 산포와 기관총의 엄호하에 정면과 측면에서 최후의 돌격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고지 위, 완전히 은폐된 지점에서의 이들을 향한 독립군의 집중사격을 당해내지 못하고 산전(山田) 본대는 끝내 백운평에 다수의 시체를 남겨둔 채 본영을 향하여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결국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 전투에서만 일본군 2∼3백 명을 사살하는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완루구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백운평 전투에 이어 10월 22일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 연합부대가 이도구 완루구에서 동지대의 주력을 맞아 대승한 전투다.

*천수평 전투
백운평 전투를 치른 직후 밤새 행군을 재촉하였던 대한군정서 독립군은 이튿날(22일) 새벽 2시 30분경 이도구 봉밀구 갑산촌에 이르렀을 때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인근의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주둔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는 이에 다시 강행군을 재촉하여 연성대를 앞세우고 1시간 가량을 행군한 끝에 천수평에 당도하였다. 이 곳에는 일본군 1개 중대 120여 명의 기병이 독립군이 접근해 온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독립군은 이들을 완전히 포위한 채 5시 30분경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였다. 깊은 수면 중에 불의의 기습을 당한 일본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한 채 허둥대기만 하다가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하고 전원이 몰사하였다. 이에 비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 2명에 부상 17명에 불과했다.

*어랑촌 전투
청산리대첩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또 가장 오랜 시간 격전을 벌였던 전투가 어랑촌 전투이다. 어랑촌은 1910년 국망 이후 함경북도 경성군 어랑사의 주민이 이도구에서 서쪽으로 10리 가량 떨어진 골짜기 안에 이주하여 개척한 마을인데 이 마을을 중심으로 10월 22일 아침부터 독립군 2,000여 명과 일본군 5,000여 명간의 격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일본군이 독립군에 비해 병력과 화력 모든 면에서 월등히 우세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항일의지로 무장한 독립군은 유리한 지형과 뛰어난 전술로 이날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와 의의
청산리전투의 총체적인 전과는 자료마다 다르지만 대략 다음과 같다.
일본군 전사자는 연대장 1명·대대장 2명을 포함하여 1,254명, 부상자는 200여 명, 독립군측은 전사 1명·부상 2명·포로 2명이라고 한다.
독립군은 우선 정신적 측면에서 조국광복을 위하여 굶주림을 견딜 뿐만 아니라 생명을 돌아보지 않는 항전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 전술적 측면에서 볼 때 독립군이 사격에 유리한 고지를 먼저 점령하여 일본군에게 정확한 타격을 가할 수 있었던 데 비해, 일본군은 삼림과 계곡 등의 지형과 지세를 적절히 이용하지 못하고 자상전(自相戰)까지 벌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독립군은 지휘관의 작전 수립·지휘 능력면에서 일본군을 능가했다.
그 동안 독립군을 양성해 온 간도와 연해주의 한인사회는 국내진입작전이 개시된 1919년 여름부터 더욱 적극적으로 독립군의 항전에 뒷바라지를 해 왔다. 대개가 개척농민으로 형성된 한인사회는 아직 경제적으로 생활기반조차 확고하지 못한 형편에서 군자금을 내어 무기와 여러 가지 군수물자를 마련케 하였고, 독립군의 식량·피복 등을 전담하다시피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일제 토벌군의 동태를 광범하고 정확하게 탐지하는 정보활동은 물론 독립군의 각종 통신연락을 담당하였으며 때로는 지형·지세를 적절히 이용해야 하는 독립군의 행군이나 전투시에 훌륭한 안내자가 되어 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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