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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투쟁의 현장,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먼 이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항일전투 1 - 봉오동 전투
좋은벗들 2006.09.20 4619


독립군의 전력강화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군은 독립전쟁의 적기가 온 것으로 믿고 본격적으로 대규모의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강렬한 민족의식과 불타는 항전의지만으로 독립전쟁을 수행할 수는 없었으므로, 여러 독립군 부대는 전력향상, 무기조달 등을 위한 피나는 노력을 하였다. 독립군의 무기는 대부분 제1차 세계대전 중 연해주에 출병하였던 체코군이 철수하면서 알게 모르게 매각하던 것을 독립군이 고가를 지불하고 구입해 온 것이었고, 무기구입에 소요된 자금은 연해주와 남북만주의 한인사회, 그리고 국내외 동포가 군자금으로 헌납한 것이었다. 무기 구입을 위해 여러 독립군단이 모금한 군자금은 1920년 5월 무렵까지 대한국민회(大韓國民會) 17만원·대한군정서(大韓軍政署) 13만원·대한군무도독부(大韓軍務都督府) 13만원(도독부 6만원과 의군단 7만원)·대한신민단(大韓新民團) 3만원·대한광복군(大韓光復軍) 4만원으로 총 50만원에 달하였다고 한다. 독립군의 이와 같은 무기확보는 자금만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한 뒤 서북간도 등지의 독립군영까지 무기를 운반하는 과정에서 관리의 엄중한 감시를 피해 비밀리에 이루어져야 했기에 그 자체가 죽음을 무릅쓴 중요한 작전이었다. 무기운송 작전에는 구입무기의 종류와 수량에 따라 다르지만 대개의 경우 수십 명에서 3∼4백 명에 이르는 체력이 강건한 독립군이 선발 투입되어 보통 1명이 2∼3정의 무기와 탄약을 분담한 채 삼삼오오 선후 연락이 끊기지 않도록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행진하였다.
한편, 독립군들은 전투력 향상을 기하기 위해 강인한 훈련을 받았다. 매일 5시간 이상 집중적인 집총훈련과 2회의 정신교육, 토사 6관이 든 배낭을 메고 완전무장한 채 산야를 구보 혹은 행군하며 전술을 익히는 고된 훈련이었다.
또 독립군은 효과적인 항일전 수행을 위하여 독립군 부대간의 연합작전 내지는 완전한 통합항전이 필요했다. 홍범도가 이끌어 온 대한독립군은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한 대한국민회 산하의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과 통합하였으니, 행정과 재정은 대한국민회가 맡았고, 군무는 양분하여 대한독립군은 홍범도가, 대한국민군은 안무가 각각 지휘 통솔하였으며, 그리고 군작전을 지휘할 때는 '정일제일군사령관(征一第一軍司令官)'이란 이름으로 홍범도가 전군을 통수케 하였다. 이와 같이 성립된 '정일제일군(征日第一軍)'은 곧이어 최진동(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도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북로독군부(大韓北路督軍府)'를 결성하고 군무도독부의 근거지인 왕청현(汪淸縣) 춘화향(春華鄕)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대대적인 국내진공작전을 계획하고 있었다.
대한북로독군부의 군비는 군영이 소재한 봉오동에 큰 토지와 재산을 가지고 있던 최진동이 가산을 헌납함으로써 상당부분을 충당하였다. 또한 대한북로독군부는 조직을 정치·행정과 군사·지휘로 분권하여 정치·행정은 최진동이, 군사·지휘는 의병 이래 명장이었던 홍범도가 맡았다. 그리하여 봉오동 골짜기와 부근 일대는 7∼8백 명 이상의 북로독군부 병력을 비롯하여 이흥수가 거느린 60명 가량의 신민단(新民團) 독립군이 집결하고 있었다.

삼둔자 전투
1920년 6월 7일에 벌어진 봉오동 전투는 그 발단이 전날에 있었던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전투(月新江 三屯子戰鬪)에서 비롯되었다.
6월 4일 새벽에 30명 가량의 독립군 소부대는 흔히 전개하던 국내진공작전의 일환으로 삼둔자를 출발한 뒤 두만강을 건너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에 있는 강양동(江陽洞)으로 진격하였다. 독립군은 이 곳에서 복강(福江)이 인솔하는 일제 헌병 순찰소대를 격파한 후 날이 저물자 두만강을 다시 건너 귀환함으로써 작전을 종료하였다.
그러나 일제 군경은 강양동에서의 패전을 보복하기 위해 신미(新美) 중위가 인솔하는 남양수비대 병력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가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 하였다. 이들 일제 군경은 삼둔자에 이르러 독립군을 발견하지 못하자 분풀이로 무고한 한인 양민만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 때 독립군은 삼둔자 서남방 산기슭 요지에 잠복하였다가 이들을 공격 섬멸시켰으니 이것이 바로 삼둔자 전투로서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중국 영토로 불법 침공한 뒤 독립군과 전투를 벌이다 참패한 처음의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
함경북도 종성군 나남(羅南)에 사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본군 제19사단은 삼둔자전투에서의 참패를 설욕하고 독립군을 토벌하기 위해 곧바로 '월강추경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삼둔자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신미(新美) 중대도 합류하여 대부대로 편성된 월경추격대대는 안천(安川) 소좌 인솔하에 6월 6일 한반도 최북단 두만강변의 하난동(下難洞 / 온성군)에 집결하여 오후 9시부터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하였다. 도강을 완료한 다음인 7일 새벽 3시 30분에 이들은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을 일거에 분쇄하기 위해 작전을 개시하였다.
일제 추격대는 작전명령대로 안산(安山 / 도문시 북쪽)을 거쳐 봉오동 입구를 향하여 고려령(高麗嶺) 서편으로 진입하여 갔다. 일제가 진입해 들어간 봉오동은 봉오골로도 불리는 긴 골짜기로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연 요새지였다. 입구로부터 거리는 25리로 그 골짜기 입구로부터 하·중·상동의 마을이 30∼60호씩 모여 있던 곳이었다.
독립군의 총지휘관인 홍범도는 접근해 오는 일본군과의 교전에 앞서 주민들을 미리 산중으로 대피시켜 마을을 공동화(空洞化)하고 험준한 사방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시켜 놓은 다음 일본군의 접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을 유인할 목적으로 이화일이 인솔하는 제2중대 제3소대 1분대의 독립군이 미리 봉오동 밖의 고려령 북편 1,200m 되는 고지와 그 부근 일대에 출동하여, 새벽 3시 50분부터 5시까지 작전을 전개하였다. 유인작전에 걸려든 적의 첨병과 주력부대는 지세가 불리한 데다가 기습을 당하여 제대로 응전치도 못하고 전열만 흐트러지는 등 크게 고전하였다. 드디어 날이 밝자 일본군 추격대는 흐트러진 부대를 겨우 재정비하고 부상병을 유원진으로 후송시키는 한편 부근 촌락을 수색하면서 봉오동 입구로 행군하여 왔다. 상오 8시 30분경에 봉오동 입구에 도달할 때까지 인적을 거의 발견하지 못한 추격대는 입구 고지에서 봉오동 하동을 정찰하고는 독립군이 이미 겁을 먹고 북으로 도주한 것으로 간주하고 전위부대를 선두로 봉오동 하동(下洞)으로 진군해 왔다. 일본군은 최진동의 집을 비롯한 하동 마을 전체를 마음대로 토색하고 미처 피난하지 못한 노약자를 살육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월강추격대'는 봉오동 하동을 유린한 다음 오전 11시 30분에 다시 대오를 정돈하여 中洞·上洞을 향하여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오후 1시경에는 일본군 전위부대가 사방 고지로 둘러싸여 있는 상동 남쪽 300m 지점의 비파동(琵琶洞) 방면으로 가는 갈림길까지 진출하여 완전히 독립군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으나 독립군의 매복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얼마 후 이들을 따라 주력부대도 기관총대를 앞세우고 역시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군의 주력이 포위망 속으로 완전히 들어왔을 때 사령관 홍범도는 일제 공격을 알리는 신호탄 발사와 함께 삼면고지에 매복하고 있던 독립군은 일본군을 향하여 일제히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독립군의 포위망 속에서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본군 추격대는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필사적으로 응전하였으나 이미 작전상 허를 찔려 사상자만 늘어날 뿐이었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의 포위망을 벗어나고자 봉오동에서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독립군의 제2중대장 강상모는 부하들을 독려하여 패퇴하는 일본군을 맹렬히 추격해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패퇴하는 일본군으로 하여금 일본군끼리 자살전을 벌이도록 하였다. 봉오동의 독립군 근거지를 말살하려던 일제 추격대는 4시간의 고전을 치른 후 동남쪽의 비파동을 거쳐 유원진으로 패퇴하였으니 이것이 유명한 봉오동 전투이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는 이러한 봉오동전투에서 거둔 전과에 대해, '일본군 사살 157명·중상 200여 명·경상 100여 명'에 달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고 발표 하였으나, 이 전과는 약간 과장된 것일 수 있다. 이에 비해 독립군측의 피해는 전사 4명, 중상 2명이라 하였다. 한편 일제는 그들 전투보고서에서 봉오동에서의 참패 사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왜곡되게 기술하였다고 한다.
독립군의 봉오동전투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에게 각기 다른 성격의 영향을 미쳤다. 봉오동에서 참패를 경험하고 난 뒤 일제는 독립군의 탁월한 전력과 강인한 투지를 새롭게 평가하게 되었고 이후 독립군의 활동에 대한 철저한 대비책을 강구하기에 이르렀고 독립군에게는 독립전쟁에 대한 큰 희망을 던져 주었다. 그리고 지휘관인 홍범도는 국망(國亡) 전후에 삼수·갑산·장백 등지에서 활동한 의병장의 면목에서 독립군의 명장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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