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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을 향한 투쟁의 현장, 항일독립운동유적지
먼 이국 땅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았던 우리 독립운동가들의
흔적을 돌아봅니다.


연변지대의 항일유적지 2 - 대종교 3인묘
좋은벗들 2006.09.20 4262


대종교 3인묘
화룡현에서 시내가 빤히 바라보이는 청호리(淸湖里)의 길가에 대종교 창시자인 나철(羅喆)의 묘소가 있다. 언덕 위로 올라가니 철조망이 쳐져 있고 세 개의 묘가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오른쪽 묘비에는 '대종교 대종사 홍암 나철 선생 신해(大倧敎大宗師弘巖羅喆先生神骸)'라고 쓰여 있고 왼쪽 묘비에는 서일(徐一)의 이름이 쓰여 있다. 그리고 오른쪽에 있는 또 하나의 무덤은 김교헌(金敎獻)의 묘라고 했다.
나철(1863∼1916)은 누구인가? 그는 전라도 보성 벌교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인영(寅永)이었다. 그는 지주의 아들로 조정에 나가 벼슬살이를 하였으나 일제가 을사조약을 맺고 침략의 마수를 뻗치자 일본으로 건너가 이등방문에 대한 강경한 항의 운동을 벌이다가 돌아와서는 이완용 등 매국 원흉을 암살하려 비밀 결사대를 만들어 활동했다.
1909년에는 김윤식(金允植)·이기(李沂) 등 동지들을 모아 일본의 신도(神道)에 맞서 대종교(大倧敎)를 창시해서 국조 단군을 받들며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그는 1916년 구월산의 단군 성사(聖祠)에 들어가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며 기도를 드리다가 일제의 만행을 적은 유서를 남기고 단전호흡으로 자살을 했다.
그는 죽을 때에 자기 시체를 나라 안에 두지 말고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유언하였던 바 그의 죽은 몸이 이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서일(1881∼1921)은 누구인가? 그는 함경도 경원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간도에 가서 윤동주가 태어난 곳인 명동에 명동중학교를 설립하고 대종교에 입교했다. 그리고 그는 독립운동도 벌여 나갔는데 3·1운동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활동했고 김좌진(金佐鎭)과 함께 북로군정서를 조직하여 그 총재가 되었으며 청산리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그 후 그는 밀산으로 가서 항일 단체의 연합체인 대한독립군단의 총재가 되었으나 이른바 흑하사변이 일어나 우리 독립 투사들이 큰 희생을 치르자 그 책임을 통감하여 자결했다.
김교헌(1868∼1923)은 누구인가? 그는 구한말 조정에서 규장각 부제학 등 고위직을 지냈는데, 대종교가 창시되자 거기에 입교하여 나철이 죽은 후 대종교의 제2대 교주가 되었다. 그는 만주로 건너와 화룡현·영안현 등지에서 대종교 포교와 독립운동을 벌였는데 경신 대참변때 병을 얻어 죽었다.
비록 묘소는 초라할지라도 이 세 사람의 묘를 청호리 마을 가까이에 나란히 쓴 것은 뜻있는 일이라 할 것이니 청호리는 만주 지방 대종교의 발상지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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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지대의 항일유적지 1 - 일송정
연변지대의 항일유적지 3 - 윤동주 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