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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
잊혀진 역사, 그러나 혼과 생명이 살아있는 발해를 찾아갑니다.


문자와 고분의 특징
좋은벗들 2007.01.30 5436


  문자와 고분의 특징

발해는 정치, 경제, 문화가 많이 발전했는데, 특히 문화는 상당한 정도로 발전했으며 고구려보다도 더 발전했다. 문화의 발전 정도를 측정하는 기준 가운데 하나가 문자의 존재 여부이다. 그래서 발해에 문자가 자체적으로 있었는가에 대한 문제가 많이 논의되고 있다. 발해 문자에 대해서 처음으로 연구한 사람은 리강이다. 그는 발해가 한자만 사용하고 자기 독특한 문자는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발해의 유물 가운데 단편적인 문자들을 모두 종합해 보면 한자도 있고 한자 아닌 것도 있다. 모르는 글자들이 상당히 많이 있다. 이 모르는 글자들을 한자의 별자체로 보느냐 무엇이냐에 대한 논의가 진행 중에 있다.

발해의 문자에 대한 방학봉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발해는 주로 한자를 사용하였다. 그것은 벽돌이나 기와에 나오는 문자들을 보고 알 수 있고, 정혜공주와 정효공주(발해의 제3대 문왕의 둘째 딸을 정혜공주, 넷째 딸을 정효공주라 하는데)의 무덤에서 나온 비석에도 모두 한자로 쓰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해가 한자 이외에, 자기 민족의 특징에 맞는 문자를 창조해서 사용했을 가능성에 대한 사례가 몇 가지 있다. 첫째, 발해에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발해 사신이 일본에 갔을 때 발해 사신을 영접한 영접자가 발해 사신을 보고 “네 이름이 뭐냐”라고 물으니,“내 이름은 우물 정 자 안에 돌석 자다” 또 “네 이름은 뭐냐”라고 물으니 “내 이름은 우물 정자 안에 나무 목자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일본 영접자는 매우 학식이 높지만 그런 한자는 옥편에 없기 때문에 생각하다 못해 그 자리에서 해석을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튿날 다시 와서 “네 이름은 우물 정자 안에 돌 석자니까 이시노마 구리다마다, 네 이름은 우물 정자 안에 나무 목자니까 기노마 구리다마다”라고 했다고 한다. 돌을 이시라고 하고, 나무를 기라고 한다. 그러니까 발해 사신이 “일본에도 확실히 학자가 있다”라고 말했던 기록이 현재에도 남아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발해 자체가 만든 문자라고 보인다.

둘째, 발해 유적에서 발견된 벽돌이나 기와에 나온 문자 가운데 한자로는 도저히 해석하지 못하는 글자들이 적지 않게 나오고 있다. 그래서 발해가 독자적으로 문자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완전히 단정하기는 어렵다. 신라도 이두를 사용하였고, 고구려도 이두가 있었다고 하는데 고구려보다도 늦게 성립된 민족에게 이두가 없었겠는가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발해 이후에 여진족이 금나라를 세웠는데 금나라도 자기 문자가 있고, 그 이후 청나라를 세운 민족도 자기 문자가 있어서 한자와 같이 썼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서 대체로 발해에는 독자적인 문자가 있었다고 여겨진다.

 

                  발해영광탑

 

발해의 유적은 대부분 중국에 있다. 북한에 있고, 러시아에 있다. 중심은 중국에 있고, 그 가운데서도 중심은 연변이다. 최근 몇 년간에 고고학 상에 발해 유적을 발굴하려고 매우 애쓰고 있는 실정이다. 그 중 최근 발견된 하나는 안도현에 있는 동청 발해무덤이며, 동청 발해무덤에서는 계단식 돌곽널무덤을 발굴했다. 돌곽널무덤은 집안의 고구려 무덤에서도 보이는데, 주위를 돌로 층계를 쌓고 그 위에 막돌을 덮는 형태로써 흙으로 봉토를 덮지 않는데 이것을 계단식 돌곽널무덤이라고 한다. 이것이 동청무덤에서 발굴되고 있다. 이것을 봐서 고구려의 문화를 계승했다고 본다.

그리고 그 무덤 가운데서 흙구덩 무덤, 흙을 파고 묻었는데 거기다 화장을 했고, 이것은 말갈족에게 많이 나타난다. 그 지대는 말갈족이 많이 살았으며 말갈족의 반지도 나오고 있다. 따라서 주류는 고구려 문화이지만, 지엽적인 것은 말갈의 문화도 섞여 있었다고 보는 근거가 된다. 그렇게 해서, 동청무덤의 발굴은 돈화 현에 있는 육정산 무덤, 정혜공주 무덤, 못지않은 의의를 갖고 있고 과학성에서도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양수에서 발해 시기의 무덤을 발굴했는데, 양수의 무덤은, 밑에는 부부간의 무덤을 합장하고 그 위에 여자를 하나 묻고 있다. 밑의 것은 원래부터 묻었던 무덤이고 위의 것은 이장한 것인데 다른 곳의 것을 가져온 것이다. 그런데 위의 것은 밑에 누운 여자의 위에다가 겹쳐 올려놓았고, 이것으로 보아서 추정되는 것은 이 남자는 첩과 본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처는 후에 죽고 후처가 먼저 죽었으며, 먼저 죽었던 후처를 딴 데 묻었다가 후에 죽은 본처의 위에 후처를 이장하여 딱 눕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것은 참 희귀한 일이다. 어쨌든 통적으로 보면 이장인데, 발해

 

                       어화원 평면도

 

 

의 무덤 가운데는 무덤에 돌을 두개, 또는 하나를 놓고 다리 곁, 옆이라든가 머리맡에 많은 뼈를 놓은 것이 있다. 이것은 노예를 순장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견해도 많지만, 중국에서는 이것은 순장이 아니라 가족장제로 보고 있다. 가족장제는 한 가정에서 사람들이 죽었을 때는 여기저기 묻었다가도 거기에 주되는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죽었을 때 그 분이 죽은 장소에 다시 모두 합장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상경에서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어화원 남문 터를 발굴하였는데, 1993년도에 와서 발굴하였다.

그 다음, 삼릉촌이라는 곳에 무덤이 있는데 상경에 서울을 잡고 있을 때 왕들을 모시던 공동묘지로써, 제1호 무덤에서 반신사자를 발견했다. 사자가 반신인데 잘 분석해 보면, 그 사자가 선사자 혹은 입자식 돌상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 1949년 정효공주 무덤에서도 사자가 둘이 나왔는데, 거기서 나온 것은 좌식, 좌작식 석상, 엉치를 꿇고 앉은 사자였고, 이번에 발굴된 삼릉촌에서 나온 사자는 선사자였다. 이것은 아주 귀한 것이다. 처음으로 이런 것이 나왔으며, 이 공동묘지에서는 선사자를 밖에 놓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릉촌에서 30여m 동쪽으로 나가서 큰 무덤을 발견하고 발굴했는데, 벽화가 나왔다. 이 벽화는 아주 희귀한 것인데, 지금까지 정효공주 무덤에서 나온 벽화가 우수하였으며, 이 벽화가 또 발굴됨으로 인하여 그 당시 발해 문화의 발전 정도를 알 수 있다. 2004년 현재 지질탐사를 했을 때, 그 주위에 몇 개의 큰 무덤이 있으며 계획적으로 발굴하고 있다.

정효공주 무덤 근처에서도 지질탐측을 했는데 정효공주 무덤보다도 큰 무덤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그 주위에 20여개의 무덤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효공주 무덤의 비문에 보면 '배장우염곡지서원(陪葬于染谷之西原)'이라는 말이 있다. 정효공주를 염곡의 서쪽 언덕에 배장하였다는 뜻으로, 배장이라는 ‘배’자는 나보다 한 급 높은 사람을 모신다는 의미다. 그리고 육정산에 있는 정혜공주 무덤에도 배장우진릉지서원(陪葬于珍陵之西原)이라고 쓰여 있다. 진릉이라는 말에서 왕의 무덤에 ‘릉’자를 붙이며, 진자는 할아버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효공주 무덤 위에는 탑이 있었는데, 정혜공주 무덤 위에는 탑자리가 없고 무덤위에 집을 지었던 자리가 있다. 탑의 기초의 규모로 보아서 이 탑은 마적달탑보다 더 컸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발해시기의 탑 자리를 발견한 곳은 세 곳이다. 첫째, 화룡 정효공주 무덤탑, 둘째, 훈춘 마적달 무덤탑, 셋째, 장백현에 있는 령광탑이다. 세 개 가운데 령광탑은 지금도 남아있다. 아주 우뚝 솟아 있는데 5층으로 되어 있다. 마적달 탑은 1921년 무너졌는데 그것은 기대에 의한 7층탑이었다. 따라서 정효공주 무덤탑은 이 마적달 탑보다 규모가 더 컸다고 보이며, 이로 보아서 적어도 7층 또는 9층탑이 아니었겠는가 생각된다.

무덤 위에 탑을 지은 것은 불교의 영향이다. 당나라에서는 탑을 짓고 탑의 지붕 위에다 사리함을 넣거나 혹은 스님들의 뼈를 불에 태운 것을 넣거나 혹은 불교의 법문을 넣거나 했지만, 발해는 그렇지 않고 왕실 귀족의 시체를 넣었다. 이것은 당나라와 발해의 다른 특징으로 당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여서 자기 민족과 자기 나라와 자기 지방의 특징에 맞게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낸 것이다. 현재 중국은 정효공주 무덤을 아주 귀중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서 벽돌집을 짓고 철문을 하고 누구도 못 들어가게 하고 있다. 그리고 일년에 춘추로 두 번 씩 와서 검사하여 안에 벽화가 훼손되지 않았나 보고 만약 손상되었으면 일차로 회칠을 하고 조치를 해서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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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수도 이전과 유적지
발해문화의 총체적인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