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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
잊혀진 역사, 그러나 혼과 생명이 살아있는 발해를 찾아갑니다.


발해의 수도 이전과 유적지
좋은벗들 2007.01.30 5843


 

 발해의 수도 이전과 유적지


  그러므로 발해의 문화가 매우 많이 남아있는 상경, 현재의 발해진에서는 7월 7석(까마따기날)에 조선족들이 모여서 운동회를 하는데, 발해진에 있는 조선족, 목단강, 영안, 심지어 훈춘, 왕청, 도문에 있는 조선족 일부도 그 곳에 가서 운동회도 하고 밧줄다리기, 널뛰기 등의 놀이를 한다. 운동회를 하는 장소는 제2궁성터인데(상경의 왕궁성터는 제1, 제2 궁성터들이 있음), 그 뜻인즉 조상의 성지에서 놀이를 한다는 뜻으로 보여진다.

그렇다면 왜 수도를 옮겼을까? 발해는 서울을 왜 4차례나 옮겼는가? 당나라는 서울을 장안에다 정하고 망한 곳도 그 곳으로 한 번도 천도하지 않았는데 반하여, 고구려와 발해는 서울을 옮긴 것이 몇 차례 되는데, 무엇 때문에 이렇게 옮겼는가는 아마도 어떤 연대성을 가진 것으로 여겨지며, 현재 이에 대하여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무엇 때문에 발해는 4번이나 수도를 옮겼을까? 여기에는 구체적인 이유가 있었는데 우선 구국(지금의 돈화)에서 중경으로 옮긴 것은 구국의 기후 조건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구국 지역은 서고성보다도 매년 매일 평균 온도가 2~4도 차이가 있는데 이것은 대단한 차이이며, 구국에서는 모를 심어도 모작기가 짧아서 농사가 잘 되지 않았고 서고성은 기온이 좋고 모작기가 길어서 농사가 잘 되었다.

또 서고성은 해란강이 있어 수량이 많아서 수리관개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한 나라의 경영을 위해서는 경제 발전이 필요하고, 그 시대의 경제 핵심은 농업이었으니, 농업 경제를 잘 발전시키자면 구국보다 서고성이 더 나았으며, 이것이 주된 원인으로 사료되고 있다. 문왕이 즉위 5년 만에 서고성으로 옮겼는데, 문왕 이전 무왕 시기에는 무치로서 나라를 다스렸으나, 문왕 시기에 와서 문치로 변했으므로, 이때는 구세력의 영향이 없는 새로운 지역이 요구되었다.

  서고성으로 옮겨 온 또 다른 원인은 옛 고구려 지역에 대한 통치를 강화, 확대하고 그 주민들의 지지를 받기 위하여 원래의 고구려 지역과 가까운 지역으로 옮길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구려 때 구국지역, 오늘 돈화지역을 통치했다는 근거는 없기 때문에 이 지역으로 이사했다고 여기고 있다.

  그럼 서고성에서 상경으로 갔다가 상경에서 왜 다시 동경으로 왔는가? 그 이유는 해상의 이득을 얻기 위해서 왔다고 생각되어진다. 해상의 이득, 일본의 길을 통해서 해상 이득을 보장했다는 것이 첫째 원인이고, 또 다른 원인은 이 땅의 비옥함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연변에서 제일 광활한 지역인 훈춘벌에서 경제를 발전시키려는 목적 하에 천도하였지만, 사실 이 지역은 바다가 가까워서 해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농사짓기가 어려웠다. 농업발전의 시도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해상 이득도 크게 얻지 못하자 결국 또 다시 상경으로 이주하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 셋째 여기서 상경으로 이주할 때 문왕이 죽고 성왕이 즉위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왕정 내부의 분파 투쟁이 심했으므로 구세력의 통치를 벗어나서 새로운 세력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천도했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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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행정구역 (5경 15부 62주)과 주요 교통로
문자와 고분의 특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