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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함께 남북국시대를 열었던 발해
잊혀진 역사, 그러나 혼과 생명이 살아있는 발해를 찾아갑니다.


발해의 유적-24개석
좋은벗들 2007.01.30 5371


 

24개석 (강동24개석, 관지24개석)

강동24개석

강동24개석 실측도

24개석이 강동에 있다고 해서 ‘강동24개석’이라 한다. 강동24개석에는 돈화로부터 상경으로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강동24개석은 돈화에 몇 개 있고, 관지 ․ 요전자 ․ 승리툰 ․ 길림성과 흑룡강성 경계에 큰 산, 노이련산을 넘어가서 묘툰, 경풍에 또 하나가 있다. 상경으로부터 돈화로 통하는 길에 몇 개가 있으며, 두만강 연안에 몇 개 있다. 그리고 연길로부터 왕청으로 가는 길, 다시 말하면 중경현덕부로부터 상경용천부로 가는 그 사이에 또 하나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동해안 연안, 다시 말하면 발해 때 남경으로부터 동경에 이르는 사이에 네 개가 발견되었다. 강동24개석은 발해 때 아주 보편적으로 있었던 것 같다.

그러면 24개석의 용도는 무엇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처음에는 사람이 죽었을 때 영구를 두고 실행하던 곳이라고 하는 설이 유력하였다. 상경이 서울일 때, 왕이 죽으면 그 시체를 관에 넣고 사람이 메고 가다가 휴식할 때 24개석에 놓고 휴식하다가 이튿날 다시 메고 갔던 곳, 즉 영구를 두고 휴식하던 곳이라고 주장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이 주장은 돈화로부터 상경으로 가는 그 사이에서 발견됐을 때는 그럴 듯 했다. ‘왕의 시체를 메고 자기 고향인 돈화로 가져다가 육정산에 묻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 동해안 연안에서도 나오고, 두만강 연안에서도 나오니까 자연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인정되었다. 

두 번째 설은 발해의 기념물이라는 것이다. 발해가 자기 건국, 자기 나라의 발전을 위해서 기념하는 그런 기념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렇게 주장한 사람도 있다.

세 번째 설은 어떤 용도로 쓰이던 목조건물이라는 것이다. 강동 24개석의 제일 모서리 부분은 돌이 여섯 개이고 한 줄에 8개씩 스물네 개다. 좌우로 한쪽에 세 개씩 한 줄에 하나씩 된다. 거기다 나무를 놓으면 움직이지 않는다. 만들어 놓은 것으로 보아서 어떤 나무를 놓고 지어진 집과 같다. 그 주변에는 기와조각도 많다. 따라서 기와를 덮은 목조건물이라는 것까지 밝혀졌는데, 이 집이 무엇에 사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의되고 있는 중이다. 

네 번째 설은 돌신이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고구려는 돌신을 많이 믿었으니 발해도 그런 돌을 만들어서 신으로 믿었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다섯 번째 설은 역참이라는 것이다. 옛날에 교통도 발전하지 못한 그 시기에 변방에서 사건이 일어나면 편지를 가지고 말을 타고 달려가서 일정한 지점에 가서 바꿔 타고 달리던 곳이라는 것이다. 현재의 역전, 역참이었을 것이라고 보는 연구자도 있다.

여섯 번째 설은 국가적으로 양식을 거두는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이렇듯 지금도 통일된 견해는 없다. 그러나 24개석은 건축물이라는 건 틀림없다고 보인다. 기와를 덮은 목조건물이었다. 강동24개석은 목단강 동안에 있다. 목단강 동안에 있는 강동24개석으로부터 상경용천부로 향해 가는 주요한 교통로 연안에 관지24개석, 림승24개석, 요전자24개석, 경풍24개석 등이 있다. 

바로 이것이 역사상에 남아 있는 독창적인 것으로서 발해의 이전시기에도 없었고 발해 이후에도 없는 유적이다. 발해는 독창적인 24개석 문화를 창조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세상에 내놓고 자랑할 수 있는 24개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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